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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음악인가] 공연을 중단한 지휘자

 오케스트라의 지휘대에 선 상상을 해보자. 지휘할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1악장은 4분의 4박자다.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첫 음을 시작하면 두 박자 후에 바이올린이 일제히 등장한다.  그런데 만일 바이올린 주자들의 연주가 잘못됐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욱 힘껏 박자를 젓는다? 모른 척하고 계속한다?   이달 7일(현지시간) 프랑스에서 파리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얍 판 츠베덴은 연주를 멈췄다. 그 후 처음부터 다시 했다. 연습도 아니고 청중이 있는 공연에서 음악을 멈추고 다시 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지휘자는 잘못된 지휘를 인정하는 수치를 견뎌야 하는 일이다. 영국의 음악 비평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1958년 지휘자 아드리안 볼트가 BBC 심포니의 연주를 중지한 후 처음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음악 무대에서는 생각보다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순간에 지나간 음(音)은 고치거나 덧칠할 수 없다. 그나마 혼자 연주할 때는 실수의 치명도가 낮다. 잘못했어도 만회할 수가 있다. 하지만 여럿이 연주할 때는 빠르게 판단할 리더가 필요하다. 바이올린 연주자 수십명이 한번 제각각 연주하기 시작하면 다시 맞추기 어려우니까.   리더가 잘못 판단하면 재앙이 된다. 2019년 러시아 모스크바. 세계적 대회인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한 중국인 피아니스트가 결선에 올랐다. 그는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기로 돼 있었는데, 지휘자는 순서를 반대로 알고 있었다. 사고가 일어날 조건은 충분했다. 연주 전 곡목을 알리는 방송은 지휘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러시아어로 나왔다. 오케스트라가 라흐마니노프를 시작했을 때 차이콥스키를 준비하던 피아니스트는 제대로 된 음을 연주하지 못했다. 상황 파악을 하고 오케스트라와 맞췄을 때는 첫 6마디쯤 놓치고 난 다음이었다.   당시 콩쿠르 측은 순서를 제대로 전하지 못한 진행 요원을 징계했지만 문제는 지휘자에게도 있었다. 피아니스트가 아무 음도 치지 못하고 당황하며 지휘자를 바라봤지만 지휘는 계속됐다. 지휘자는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판단도 불가능했다. 콩쿠르 측은 참가자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겠다고 했지만 참가자가 거부했고, 이 장면은 두고두고 콩쿠르의 오점으로 남게 됐다.   1958년에 아드리안 볼트는 BBC 심포니와 마이클 티펫의 교향곡 2번을 지휘하다 첫 2분을 조금 넘기고 연주를 멈췄다. 뒤로 돌아서서 청중에 “모두 나의 잘못”이라 한 후 처음부터 연주했다. 이 연주는 유튜브에서도 들을 수 있다. 이달 초 츠베덴과 파리 오케스트라가 다시 시작한 쇼스타코비치 또한 훌륭했다고 한다. 리더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으면 꼬여버린 연주로 남을뻔한 장면들이다. 김호정 / 한국 문화팀 기자왜 음악인가 지휘자 공연 지휘자 아드리안 바이올린 연주자 차이콥스키 콩쿠르

2022-04-20

[문화 산책] 2등도 대접받는 사회

 연극을 제법 오래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얄궂은 버릇이 생겼다. 그냥 지나쳐도 좋을 일상의 자잘한 장면을 보면서 내 멋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즐겁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음악회 연주 장면을 영상으로 본다.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독주자가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연주자의 진지한 얼굴 표정, 바이올린 현과 활의 격렬한 어울림… 때로는 지휘자의 멋진 모습도 비춘다. 화려한 연주복으로 잘 차려입고 악기에 몰두하는 독주자 뒤쪽으로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의 모습이 보인다. 독주자를 바라보는 연주자의 눈길이 뭔가를 말하는 것 같다. 여기서부터 내 멋대로의 상상력이 시작된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음악학교 동기동창일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두 사람은 우정으로 똘똘 뭉쳐 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실력은 막상막하였고, 장래의 꿈도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미묘하던 차이가 세월이 흐르고 이런저런 사연이 겹치면서 점점 더 벌어져갔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어낸 것일까? 실력, 우연, 불쑥 찾아든 사랑과 연애, 환경, 운명, 성공을 향한 지독한 집념….   그렇게 세월은 흘러 한 사람은 유명한 독주자가 되고, 한 사람은 평범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 한 무대에서 연주를 한다. 많은 생각이 오가는 것이 당연하다. 성공한 친구에 대한 축하와 자랑스러운 마음, 그 밑에 깔린 부러움, 시샘, 열등감, 자괴감 등등… 연극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누가 더 행복한지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가령,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힐러리와 재키’를 보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을 거둔 재클린의 처절한 고독이 가슴 아프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 현실에도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미국으로 이민을 오지 않았다면 내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지금보다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 착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제법 출세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미국에 온 길에 일부러 들렀으니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비서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거들먹거리는 꼴이 영 꼴불견이다.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사람이란 존재가 참 단순하고 우매해서 자기보다 잘 나가는 사람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우쭐대는 마음이 앞서게 마련이다. 별 근거 없는 자만심과 열등감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사는 것이다. 그 격차를 줄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비교를 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실천은 어렵다.   문제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가령, 우리 한국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버릇, 백인들에게는 주눅 들고, 피부 색깔 짙은 사람들은 마구 대하는 고약한 버릇의 근거와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설득력 있는 기준은 없다. 있을 수 없다.   세계적 화제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깐부 할아버지’로 강한 인상을 남긴 배우 오영수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다.   “우리 사회가 1등이 아니면 존재하면 안 되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어요. 2등은 필요 없다. 그런데 2등은 1등에게 졌지만 3등에게는 이겼잖아요. 다 승자예요.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승자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애쓰면서, 내공을 갖고, 어떤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승자가 아닐까 싶네요.”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사회 바이올린 연주자 독주자 뒤쪽 우리 사회

2021-11-07

[문화 산책] 2등도 대접받는 사회

 연극을 제법 오래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얄궂은 버릇이 생겼다. 그냥 지나쳐도 좋을 일상의 자잘한 장면을 보면서 내 멋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즐겁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음악회 연주 장면을 영상으로 본다.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독주자가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연주자의 진지한 얼굴 표정, 바이올린 현과 활의 격렬한 어울림… 때로는 지휘자의 멋진 모습도 비춘다. 화려한 연주복으로 잘 차려입고 악기에 몰두하는 독주자 뒤쪽으로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의 모습이 보인다. 독주자를 바라보는 연주자의 눈길이 뭔가를 말하는 것 같다. 여기서부터 내 멋대로의 상상력이 시작된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음악학교 동기동창일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두 사람은 우정으로 똘똘 뭉쳐 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실력은 막상막하였고, 장래의 꿈도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미묘하던 차이가 세월이 흐르고 이런저런 사연이 겹치면서 점점 더 벌어져갔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어낸 것일까? 실력, 우연, 불쑥 찾아든 사랑과 연애, 환경, 운명, 성공을 향한 지독한 집념….   그렇게 세월은 흘러 한 사람은 유명한 독주자가 되고, 한 사람은 평범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 한 무대에서 연주를 한다. 많은 생각이 오가는 것이 당연하다. 성공한 친구에 대한 축하와 자랑스러운 마음, 그 밑에 깔린 부러움, 시샘, 열등감, 자괴감 등등… 연극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누가 더 행복한지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가령,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힐러리와 재키’를 보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을 거둔 재클린의 처절한 고독이 가슴 아프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 현실에도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미국으로 이민을 오지 않았다면 내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지금보다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 착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제법 출세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미국에 온 길에 일부러 들렀으니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비서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거들먹거리는 꼴이 영 꼴불견이다.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사람이란 존재가 참 단순하고 우매해서 자기보다 잘 나가는 사람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우쭐대는 마음이 앞서게 마련이다. 별 근거 없는 자만심과 열등감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사는 것이다. 그 격차를 줄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비교를 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실천은 어렵다.   문제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가령, 우리 한국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버릇, 백인들에게는 주눅 들고, 피부 색깔 짙은 사람들은 마구 대하는 고약한 버릇의 근거와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설득력 있는 기준은 없다. 있을 수 없다.   세계적 화제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깐부 할아버지’로 강한 인상을 남긴 배우 오영수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다.   “우리 사회가 1등이 아니면 존재하면 안 되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어요. 2등은 필요 없다. 그런데 2등은 1등에게 졌지만 3등에게는 이겼잖아요. 다 승자예요.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승자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애쓰면서, 내공을 갖고, 어떤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승자가 아닐까 싶네요.”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사회 바이올린 연주자 독주자 뒤쪽 우리 사회

202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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